인간에게 소금은 생존상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원시시대에는 인간은 조수(鳥獸)나 물고기를 잡아 굶주림을 채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초식동물은 식물 속에 함유된 미량의 염분을 몸속에서 농축하여 가지고 있으며,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을 잡아먹고 그 염분을 소금의 보급원으로 삼았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인간이 먹는다는 순환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농경생활을 하게 되고 언제 잡힐지도 모르는 동물을 쫓지 않고 농사지어 만든 식물을 양식으로 섭취하게 되자, 생리적 요구를 충족할 만한 소금을 보급하는 일이 어렵게 되고, 또한 식물 속에 함유된 칼륨을 많이 섭취하게 되었기 때문에 균형상 소금을 더욱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하여 인간은 따로 소금을 만들어 이것을 식품으로 할 필요가 생겼다.
그 결과 이미 선사시대에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 염호나 암염이 있는 장소는 교역(交易)의 중심이 되고, 산간에 사는 수렵민이나 내륙의 농경민은 그들이 잡은 짐승이나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기 위하여 소금 산지에 모이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도 소금을 얻기 위한 교역로가 발달하였다. 그 중심지 가운데에는 소금을 만드는 집을 뜻하는 독일어의 할레(Halle) · 할슈타트(Hallstatt)나 영어의 위치(-wich)가 붙은드로이트위치(Droitwich) · 낸트위치(Nantwich) 등의 지명으로 현재도 남아 있다.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도 소금과 관련된 지명이다. 로마시대에는 소금이 관리나 군인에게 봉급으로 지불된 일이 있다. 봉급을 뜻하는 영어의 샐러리 (salary)는 현물급여(現物給與)를 뜻하는 라틴어 살라리움에서 유래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 때에 시체를 소금물에 담갔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하여 소금을 비료로 사용하였다. 또 그들은 인간의 생활에 중요한 소금을 신에게 바치고, 신에게 바치는 짐승의 고기는 짜게 하였다.
이런 풍습은 그리스 사람이나 로마 사람에게도 있었다. 그리고 소금이 물건의 부패를 방지하고, 물건을 불변으로 하는 힘이 있다고 하여 고대인은 소금을 변함없는 우정 · 성실 · 맹세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원시시대에는
바닷물을 증발시켜서 채취하거나 해조(海藻)를 태워서 얻기도 하였는데, 사막의 오아시스에는 염분을 함유한 물이 솟아 나와 대상(隊商)은 그것에서 소금을 얻었다. 유럽에서는 철기시대부터 암염이 이용되고, 때로는 암염이 있는 곳에 물을 붓고 소금이 녹은 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채취한 일도 있다.
소금은 생활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아, 소금생산자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많은 역할을 하게 되자 유럽에서는 BC 6세기경,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때부터 소금의 전매제를 실시하여 국가에서 생산과 공급에 대한 통제가 실시되었다.
고대 소금의 주요 생산지는 이탈이아, 이집트, 에스파니아, 그리스 등 지중해 주변의 해안지역 이었다. 이는 사막의 많은 도로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제노바, 베네치아를 포함한 많은 도시들이 소금 무역 중심지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페르시아, 이집트에서는 왕실에서 소금을 독점 하였는데,그 당시는 소금을 장악하는 것이 곧 권력을 장악 하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이전의 소금에 대한 문헌은 매우 적다.
다만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고구려조에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대목이 있을 뿐이다.
신라나 백제에서도 해안지방에서 소금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도염원(都鹽院)을 두어 염분(鹽盆)을 국가에서 관장하여 직접 소금을 제조?판매하여 재정수입원으로 삼았으며, 충렬왕(忠烈王)때 사유로 이관하였다가 다시 1309년(충선 1) 염정을 민부(民部)에 이관하고 유통부분에서는 중국의 입포매법(立鋪賣法)과 계구매법(計口賣法)을 모방하여 포(布)를 납부하게 하여 소금을 구입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력가들이 염전을 장악하여 염세를 거두지 못하다가 균역법 시행과 함께 징수규정이 마련되었다.
염세는 염전의 규모 염전의 생산성. 품질. 소비지와의 거리등을 고려하여 차등징수 하였다. 또 먼 곳에 위치한 곳에서는 염창을 세워 세염을 받아 비축하였다. 직물, 곡물로 바꾸어 군자로 쓰게 하였다. 1907년 인천 주안에 근대적 의미의 천일염전이 조성되었고 일본 강점기 및 해방 후 정부 주도로 전매제도가 실시되었다.